리처드 애버든은 뉴욕에서 태어났고 그의 사진에 대한 관심은 어린 나이에 시작되었다. 그는 12살의 나이에
히브리 협회 카메라 클럽에 가입했다. 그는 브롱크스에 있는 드윗 클린턴 고등학교를 다녔고, 그곳에서 제임스
볼드윈과 함께 학교의 문학 잡지인 "The Magic' 을 공동 편집했다 그는 1941년 뉴욕 고등학교에서 시인으로
불려졌었다.
에버든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1942년 미 상선에서 사진작가 메이트 이등병으로 복무했다. 그가 설명했듯이,"제
일은 신원사진을 찍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사진작가가 되기 전에 10만 명의 얼굴 사진을 찍었음에 틀림없다."고
했다.
그는 2년간의 봉사 후, 상선을 떠나 전문 사진작가로 일했고 처음에는 패션 이미지를 만들고 새로운 사회 연구
학교의 디자인 연구소에서 알렉세이 브로도비치와 만나 사진을 공부하게 된다.
1942년부터 2년 동안 미국 재무부 사진실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22세의 나이에 애버든은 주로 하퍼즈 바자에서 프리랜서 사진작가로 일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잡지사 스튜디오
를 이용하는 것을 거부했고 거리, 나이트클럽, 서커스, 해변, 그리고 다른 흔치 않은 장소에서 모델과 패션
사진을 찍었다.
그의 예술의 특징은 끝없는 지략과 창의력이었다. 브로도비치의 지도 아래, 그는 곧 하퍼 바자의 수석 사진 작가가
되었다.
그는 경력 초기부터 많은 것들 중에서 Theater Arts, Life, Look, Harper's Baza 잡지에 출판하기 위해 공식적인
초상화를 만들었다. 그는 자신의 개성을 제시하고 피실험자들의 삶을 환기시키는 사진의 능력에 매료되었다.
그는 포즈, 태도, 헤어스타일, 옷, 악세사리를 이미지의 중요한 계시를 주는 요소로 삼았습니다. 그는 사진술의
2차원적 성격을 전적으로 신뢰했는데, 그것은 그가 그의 문제적이고 서술적인 목적을 위해 기울인 규칙이었다..
그가 쓴 글처럼 "My photographs don't go below the surface. I have great faith in surfaces. A good one
is full of clues."
당시 바자의 편집장 '카멜 스노'와 유명한 에디터 '브릴랜드'에게 인정을 받으면서 애버든은 연 2회 파리컬렉션에
동행하는 기회가 주어졌고 1947년에는 '스노'가 '뉴룩'이라고 격찬한 '크리스챤 디올 컬렉션'의 그 역사적인 현장
에서 패션사에 길이 남는 라인의 시대를 연 사진을 남긴다.